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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야류 소개

    수영야류 역사와 유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수영민속협회  

    본문

    수영야류는 정초부터 보름까지 이어지는 전통 세시 놀이로, 지신밟기, 길놀이, 탈놀음 등 다양한 행사를 포함한다. 양반풍자, 남성횡포 비판, 악귀를 쫓는 사자춤 등 극적인 내용으로 민중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담고 있다. 단순한 탈놀음이 아닌 마을굿과 연극의 중간 형태로, 웃음과 풍자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민중의 삶에 활력을 주는 대표적 민속극이다. 수영야류는 한국 민중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국가무형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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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은 원래 좌수영(左水營)의 준말로 조선시대 선조 때에 현재의 수영동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 水軍節度使營)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폐영이 된 뒤에도 오늘날까지 관아의 명칭을 줄여서 그대로 부르고 있다. 현재 수영이라 할 때 좁게는 행정구역상으로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만 가리키기도 하고, 넓게는 수영구, 즉 수영동을 중심으로 수영구의 망미동, 민락동, 광안동 일대를 두루 지칭하기도 한다. 


    수영지역의 북쪽은 장산(萇山)과 황령산(荒嶺山)이 있어 북풍을 막아 주고 그 사이에 사천(絲川, 현재의 수영강)이 남쪽을 향하여 수영만으로 흐르면서 수영평야를 이루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이다. 이런 지형은 취락을 이루기에 알맞은 곳이다. 더욱이 수영평야가 비옥하고 바닷물과 민물이 합수하는 수영만은 어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농업은 물론 수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좋은 자연적인 조건 때문에 이 일대에 취락을 이루어 수영평야에 농사를 짓고 수영만에 고기잡이를 하면서 사람들이 살았다. 수영사람들은 수영동뿐만 아니라 황령산 아래 광안리, 망미동, 남천동 일대에 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이런 생활여건에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 농경(農耕)에 관계된 의식(儀式)을 행하고 이에 따른 놀이를 하여 왔다.


    수영지역이 번화한 군영지대로 된 것은 조선시대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이전해 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은 원래 부산포(戡蠻夷浦)에 있었는데, 태종 때에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겼다가 선조 25년(1592)에 동래 남촌(南村, 현 수영동)으로 옮겼다. 그 뒤 수영진은, 인조 13년(1635)에 홍수로 사천(絲川)이 범람하고 강구가 매몰되어 감만이포(戡蠻夷浦)로 이전되었으나 그곳이 왜관(倭館)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것이 염려되어 효종 3년(1652)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그 이후 고종 32년(1895) 군제 개혁으로 폐영되기까지 244년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이곳 수영동에 존속하여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수영지역의 지명이 동래부 남촌면(南村面)이었는데, 숭정리(崇亭里, 현 망미동), 북문외리(北門外里, 현 수영동), 남문외리(南門外里, 현 수영동), 동부리(東部里, 현 수영동), 서부리(西部里, 현 수영동), 감포리(甘浦里, 수영 백산 아래 바닷가) 축산리(丑山里, 현 광안동) 포리리(包伊里, 수영교 근방), 칠포리(漆浦里, 수영 백산 아래 바닷가), 대연리(大淵里, 현 대연동), 석포리(石浦里, 현 대연4동), 남천리(南川里, 현 남천동), 분포리(盆浦里, 현 용호동), 우암리(牛岩里, 현 우암동), 감만리(戡蠻里, 현 감만동), 용당리(龍堂里, 현 용당동) 등 16 이(里)로 그 영역이 부산의 동남단인 수영강 연안으로부터 서쪽은 우암동에 이르는 연안 일대와 북쪽의 망미동까지 포괄하여서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현재의 부산시 수영구와 남구 행정구역을 합한 것과 거의 같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부리, 서부리, 북문외리, 남문외리는 경상좌수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다. 오늘날 수영동이라는 행정 동명은 경상좌수영이 자라잡고 있던 과거 수영성 안의 동부리와 서부리, 그리고 성 밖의 북문외리와 남문외리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다. 수영동을 중심으로 수영구의 망미동, 민락동, 광안동 일대를 두루 지칭하여 수영이라고 말할 경우는 1950년대의 부산시 동래구 수영출장소 관할구역, 그리고 오늘날 부산광역시 수영구와 그 영역이 거의 같다.


    수영야류의 탈놀음은 동부리, 서부리, 북문외리, 남문외리, 즉 오늘날 수영동 사람들이 놀고, 탈놀음의 놀이꾼들이 이 마을들의 마을 굿 당을 돌며 고사를 올린다. 놀이와 한마당 춤 놀이에는 동래군 남면 지역 사람들이 다 참여하였고, 수영출장소가 해운대출장소로 분할되기 전에는 멀리 해운대, 재송동 사람들까지 놀이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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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래

    학계에서 탈을 쓰고 노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탈놀이, 탈놀음, 탈춤, 탈춤놀이 등으로 혼용하고 있지만 개념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가려 써야 할 것이다. 탈을 쓰고 행하는 우리의 모든 연행에는 놀이성, 연극성, 무용성이 다 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강한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농악대의 잡색놀이꾼이 탈을 쓰고 노는 따위는 춤도 추고 연기적인 행위를 하지만 그것보다 놀이성이 강하여 탈놀이(假面戱)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처용무는 잡귀를 쫓고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처용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것이므로 무용성이 강하여 탈춤(假面舞)이라고 한다. 한편 양주별산대, 봉산탈춤, 오광대 같은 것은 춤도 추고 흥겹게 놀지만 집약적인 사건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연극성이 두드러지므로 탈놀음(假面劇)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모든 탈놀음에는 제의성과 연극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강한가에 따라 굿 탈놀음(祭儀的假面劇)과 극 탈놀음(演劇的假面劇)으로 갈래지을 수 있다. 굿 탈놀음은 제의가 행해지는 층위에 따라서 나라 굿 탈놀음(國祭假面劇), 고을 굿 탈놀음(邑祭假面劇), 마을 굿 탈놀음(洞祭假面劇)으로 나눌 수 있다. 극 탈놀음은 놀이 주체가 유랑하는 전문적인 연예집단이 공연하는가, 그 지역의 토착주민이 세시적 행사의 하나로 놀이하는가에 따라 떠돌이 극 탈놀음(떠돌이탈놀음)과 토박이 극 탈놀음(토박이탈놀음)으로 나눌 수가 있다.